밀양박(朴)씨 중식조 밀직부원군 중미公
밀양박씨는 모든 박씨 가운데 제일 종가이며
박씨에서 10여 개의 본관으로 나뉘어 지고,
밀양 박씨 내에서도 여러개로 분파되었다.
(일반적으로 12중시조를 중심으로 12파라 함,
하지만 12파 역시 각기 수 많은 세파로 분파 됨 )
이러한 밀양박씨는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 제 54대 왕, 재위기간: 917 ∼ 924)의
8대군 중 세자(世子)인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지고 있으며,
단일 본관(單一本貫)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伐族)이다.
1. 시조왕 박혁거세
우리 가문의 원조 혹은 시조왕 즉 가장 최초의 조상으로는 신라 시대의 최초의 왕인 박혁거세이다.
혁거세왕은 신라의 시조(재위 BC 57∼AD 4)이면서 동시에 박씨의 시조이다.
박혁거세는 기원전 69년 양산촌(楊山村) ·고허촌(高墟村) ·진지촌(珍支村) ·대수촌(大樹村) ·가리촌(加利村) ·고야촌(高耶村) 등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뽑기 위한 논의를 하던 중 남쪽 방향의 양산 아래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백마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다. 이들이 그곳에 가보니 박같은 알이 있어 이를 깨어 보니, 잘생긴 사내아기가 나왔다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연유로 그아이를 혁거세라 이름지었고, 박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박씨라 하였다.
그가 곧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이다.
혁거세는 경주 나정의 큰 알에서 태어나 이미 나이 10여세 때 매우 출중함을 보였고, 그 탄생 또한 신비하여 존경을 받다가 나이 13세 때인 기원전 57년에 당시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진한 6촌의 촌장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어 신라의 시조왕이 되었다. 혁거세왕의 왕호(王號)는 거서간(居西干), 국호는 서라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혁거세왕의 비(妃)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다. 알영부인은 BC 53년 1월 박혁거세왕이 태어난 같은 날에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閼英井)이라는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 갈비에서 어린 여자 아이가 나왔다 한다. 이 아이는 얼굴과 입술은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아 보기가 흉해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 이름지었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德氣)가 있으므로,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13세에 왕이 되자 알영을 왕비로 맞아들였다고 한다(「삼국사기」)
BC 41년 혁거세가 알영부인을 동반, 6부(部)를 순행하면서 백성에게 농잠(農蠶)을 권면하여 생산의 증가에 힘쓰니, 백성들이 이들을 이성(二聖)이라 칭송하였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대 왕은 박, 석(昔), 김의 3성이 돌아가며 하였는데, 그중 박씨 성을 가진 왕은 시조인 박혁거세를 포함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으며,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의 혼인을 피하는 이유도 이러한 까닭이다. 혁거세는 BC 37년 서울에 금성(金城)을 쌓고, BC 32년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4년 61세로 죽자 담엄사(曇嚴寺) 북쪽의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지금 위치는 경주시 남천(南川)의 남쪽이다.
2. 중시조 밀성대군
신덕왕은 박씨 29세손인 경명왕(신라 54대왕)과 경애왕(신라 55대왕) 그리고 효염(孝廉) 등 3명의 아들을 놓게 된다. 이들 아들들은 각기 분파하여 하나의 집안을 형성하게 된다. 경애왕의 후손들은 계림대군파로 이어져 내려갔다.
경명왕계는 아들대에서 무려 9개 파로 분리된다. 이 박혁거세의 29대 손인 경명왕이 박혁거세 다음으로 우리 가문의 원조가 되는 조상이다.
그러나 경명왕에 이르는 29대 선조들은 밀양박씨던 월성박씨던 모든 박씨의 공통의 조상으로서 밀양박씨 만의 원조라기 보다는 박씨 모두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밀양박씨의 실질적인 조상은 경명왕의 장자인 밀성대군이라 할 수 있다. 즉, 경명왕의 자식 중 한분인 밀성대군이 우리의 중시조가 된다. 경명왕은 아들 9형제를 두었고, 이들 아들들이 각각 하나의 파를 형성하면서 현재의 박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첫째 아들 언침公은 밀성대군(密城大君)으로서 밀양박씨, 반남박씨, 진원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둘째 언성公은 고양대군(高陽大君)으로서 고령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셋째 언신公은 속함대군(速咸大君)으로서 함양박씨, 삼척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넷째 언립公은 죽성대군(竹城大君)으로서 죽산박씨, 음성박씨, 고성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다섯째 언창公은 사벌대군(沙伐大君)으로서 상주박씨, 충주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여섯째 언화公은 완산대군(完山大君)으로서 전주박씨, 무안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일곱째 언지公은 강남대군(江南大君)으로서 순천박씨, 춘천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여덟째 언의公은 월성대군(月城大君)으로서 경주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아홉째 교순公은 국상공(國尙公)으로서 울산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결국 우리 밀양박씨는 경명왕의 자식들 중에서 밀성대군의 후손으로서 밀성대군이 밀양박씨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밀양박씨가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된 것은 경명왕(景明王)의 첫째 왕자(王子) 언침(彦 )公이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封)해진데서 연유된다.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公은 밀양박씨의 중시조로서 혁거세(赫居世) 성조의 30세손이며,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8왕자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혼란기에 밀성군에 봉해졌고, 1천여년 동안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신라의 왕족으로서 활동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불행히도 매몰찬 세월의 풍진(風塵) 속에 묘소마저 깎이어, 단소(壇所)를 세워 모시고 있다. '밀성(密城)'이란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密陽)의 옛 지명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는 신라의 이궁대(離宮臺)와 세루정(洗陋亭)과 같은 여러 정자가 있어 역대 왕들이 자주 들러 백성을 위무하고 정사를 보았다고 하며, 경명왕의 맏왕자가 밀성군으로 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밀성대군 언침의 단소(壇所)와 서원 및 재실을 보면, 율산서원은 경북 경산시에 있으며, 밀성대군 언침이 배향된 재실 명일재는 경남 밀양시 내일동에 소재해 있다.
밀성대군 언침公의 후손으로는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한 욱(郁, 31세)公, 독포사(督捕使)를 역임한 난(,32세),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영정(永禎, 33세)公, 합문지후(閤門祗候)에 봉임된 기세(基世, 34세)公,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한 시주(施做, 35세)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한 찬행(讚行, 36세)公 등으로 이어진다.
3. 중시조 밀성부원군 언부公
문하시중을 역임한 찬행公은 밀성부원군 언부(彦孚)公와 도평의사사를 역임한 언상(彦祥)公, 복야공 언인(彦仁)公 등 3명의 아들을 둔다. 이중 밀성부원군 언부公이 또 하나의 우리 중시조가 된다.
밀성대군 8세손 언부公은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신權臣)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중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로 인해 언부(彦孚)公에 이르러 밀양박씨에서는 다시 분파가 있었다. 언부公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언상公)·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언인公)·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양언公)·판도공파(版圖公派: 천익公)·좌윤공파(左尹公派: 을재公)으로 분파되었다. 또한 이들의 후손에서도 진사공파(進士公派: 10세손 원)·밀성군파(密城郡派: 13세손 척)·동정공파(同正公派 : 13세손 원광)·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15세손 중미)·정국공파(靖國公派: 15세손 위)·규정공파(糾正公派: 16세손 현) 등으로 분파(分派)가 되어 크게 밀양박씨의 12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온다.그리고 10세손 환(桓)이 영암 박씨(靈岩朴氏)로 분적(分籍)하는 등 10여 개 본관으로 갈라지기도 한다.
밀성부원군 언부公은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은 효신(孝臣)公이며 둘째 아들은 의신(義臣)公이다. 이중 효신公은 문익공으로서 밀양박씨 충렬공파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의 직계 조상은 둘째 아들인 의신公이 된다. 의신公은 고려 인종 때 공부상서를 역임하였으며 우리의 중시조가 된다.
밀성부원군 언부公의 차남 의신公의 후손에서는 사문진사(四門進士) 원(元: 의신의 맏아들)公의 계통과 의흥위(義興衛)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던 척(陟: 의신의 현손)公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원(元)의 8세손 의중(宜中)公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에 장원하고 우왕(禑王)때 대사성(大司成)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뒤에 공신(功臣)에 올랐으며, 조선이 개국(開國)하자 조준(照準)·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했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門人)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우아한 문장(文章)으로 문치(文治)에 고명(高名)하였다. 문종(文宗)때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재직중 야인(野人) 토벌에 전공을 세웠던 거겸(居兼)公은 의중의 손자이며 증판서(贈判書)인 경빈(景斌)公의 아들로 성종(成宗)때 좌리사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또한 우리의 직계 선조인 의신公의 아들 윤(允)公의 계통에서는 중미公이라는 걸출한 분이 나타난다.
4. 중시조 밀직부원군 중미公
그리고 또 하나의 중시조로는 밀직부원군인 중미(中美)公를 들 수 있다. 밀직부원군 중미(中美)公은 호가 죽은(죽은)으로서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언부(彦孚)公의 8세손이다. 고려 충목왕(忠穆王)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오르고, 고려말인 1361년(고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괴수(魁首)인 모거경(毛居敬)이 서경을 침범하였을 때 공민왕을 호위하며 안유(安裕), 이방실(李着實), 홍언박(紅彦博)등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인해 보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補理功臣,大匡 輔國, 崇錄大夫)에 가자되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중미公은 현풍 소리에서 거주하였으며, 묘소는 청도군 풍각면 월봉동 묘봉(豊角 妙峰)에 자리하고 있다. 중미公의 묘소가 임진왜란의 난리통에 실묘하였으나 그후 묘하지석을 찾아내어 묘소를 찾고 지금은 후손들이 수호봉안하고 있다. 묘소는 선생의 묘소가 있는 마을 입구에 왕이 선생의 공훈에 하사한 사패지가 수 친평에 달했는데 이 토지를 경계하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사패지 표석이 지상 6척 정도의 높이로 세개가 장승처럼 나란히 우뚝 서 있다. 그 가운데 한개에는 밀직부원군 사패지 표석(密直府院君,賜牌地 標石)이라고 음각으로 깊이 새겨져 있다.
일화로 왜정시대에 어떤 사람이 무엇에 쓸려고 그 중 한개를 파서 뽑아내어 눕혀 두었는데 그 이튼날부터 졸지에 온 마을안에 이름모를 병에 걸리고 온갖 불상사가 잇따라 일어나 마을이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다 누구인지 사패지 표석을 뽑은 것이 화근이라는 말이 나오자 마을사람들은 표석을 원래의 자리에 도로 갖다 세웠다. 그랬더니 마을에 일어났던 액운이 말끔히 사라지고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다 한다. 지금도 그 사패지 표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밀직부원군 중미公은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가 희公이고 둘째가 해公이다. 희公은 화령군 소윤이라는 직책에 올랐고, 해公은 대사헌이라는 직책에 올랐다. 따라서 이 분들의 직책을 인용하여 각기 하나의 파로 분파되었는데,
희公의 후손들은 밀양박씨 소윤공파(小尹公派)라 하게 되고, 다른 한 분 해公의 후손은 밀양박씨 대헌공파(大憲公派)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에 따라 밀양박씨 소윤공파에 해당하게 된다. 희公의 묘소는 풍각 묘봉에 있다.
< 밀양박씨 12중시조(12파) >
| 밀성부원군파 | 도평의사공파 | 밀성군파 | 밀직부사공파 | 판도판각공파 | 좌윤공파 |
8세손 | 박언부 (태사공파) | 박언상 (도평의사공파) | 박언인 (복야공파) | 박양언 (밀직부사공파) | 박천익 (판도판각공파) | 박을재 (삼사좌윤공파) |
10세손 | 박원 (사문진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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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손 | 박척 (충헌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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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광 (영동정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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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손 | 박중미 (밀직부원군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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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위 (정국군파) |
16세손 | 박현 (규정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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